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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13명 중 2명 서명 못 받아…90세 할머니 호흡기 달고 고통

  • LV 14 아들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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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11 10:50

[존엄사 8개월, 웰다잉 확산 中]
현실과 동떨어진 존엄사법
환자 뜻 모를 땐 가족 다 동의 필요
"언제 손자들까지 찾아 서명받나"
미국선 법정대리인 제도 활용

병원 윤리위 있어야 존엄사 가능
요양병원 1526곳 중 22곳만 설치
사전의향서 작성해도 무용지물

 

얼마 전 90세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져 서울의 큰 대학병원에 실려왔다. 수술할 상황이 못 돼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의식이 없고 스스로 호흡을 못해 인공호흡기를 달았다. 뇌사(腦死·뇌의 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가까워 의료진은 가족에게 무의미한 연명의료 중단을 권했다. 할머니는 연명의료를 거부한다는 서약서(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지 않았고, 평소 그런 뜻을 표현했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가족 전원이 연명의료 중단에 합의하는 것. 60세 전후의 자녀 6명은 이의가 없었다. 손자 13명에게서 문제가 발생했다. 한 명이 재소자였고, 한 명은 가족과 불화가 생겨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무조건 가족 전원(자녀와 손자녀)이 서명하고 가족관계증명서로 가족임을 증명해야 한다.

결국 자녀 두 명이 나섰다. "어머니가 기계를 달고 임종하는 걸 원하지 않은 것 같다"고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다. 자녀 두 명이 어머니의 뜻을 추정해 진술하면 되는 조항을 적용했다. 의료진은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했고, 얼마 안 돼 세상을 떴다. 19명의 서명을 받느라고 할머니는 일주일 넘게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연명의료 중단, 즉 존엄사 제도가 어렵게 시행됐지만 경직된 비현실적 조항이 적지 않아 웰다잉 확산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남용을 걱정한 나머지 너무 엄격하게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환자의 뜻을 모를 때 가족 전원이 합의하는 조항 때문에 문제가 적지 않게 생긴다. 50대 말기 간경화 환자는 간이식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의료진의 설명을 듣고 연명의료 중단에 동의했다. 하지만 기력이 없어 서명하지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연명의료계획서에 본인이 반드시 서명해야 한다. 나중에 연락 없이 지대던 가족이 나타나 "끝까지 치료해 달라"고 요구해 이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의식이 없던 80대 만성폐쇄성 폐질환 환자는 아들 둘이 투석 치료를 안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아들이 모르던 딸 2명이 있었고, 이들의 동의를 받지 못해 투석 치료를 계속하다가 숨졌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심폐소생술·인공호흡기 등은 촌각을 다투는 일인데 언제 가족 전원을 찾고 가족관계증명서를 떼고 손자까지 서명하느냐"고 말한다. 바른미래당 최도자 의원은 6월 가족의 범위를 1촌 이내의 직계 존속·비속으로 좁히는 내용을 담은 법률 개정안을 발의해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이일학 연세대 의대 의료법윤리학과 교수는 "미국의 경우 대리인 제도를 활용하는 주가 많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을 법정 대리인으로 지정해 임종 상황에서 환자의 의사를 대신 전해 준다. 이런 제도를 만들면 현장에서 혼선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윤리위와 연명의료 제도를 운영하려면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돈과 공간이 필요한데, 현행 건강보험 수가가 그 정도를 커버해 주지 못한다. 대한병원협회 김선태 대외협력 부위원장은 국회 토론회에서 "종교계·법조계·시민단체 등에서 추천한 2명을 포함하기 때문에 소규모 의료기관이나 요양병원이 윤리위를 운영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여의도성모병원 관계자는 "내부 사정이 있어 윤리위 위원 선정을 못하고 있다. 부서 간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상계백병원 관계자는 "곧 윤리위를 구성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요양병원도 구멍이다. 1526개 중 22개(1.4%)만 위원회를 설치했다. 대부분의 요양병원에서 연명의료 중단을 할 수 없다. 한 폐암 말기환자(78)는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한 채 서울대병원을 오가며 항암치료를 하던 중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요양병원 당직 의사는 심폐소생술을 한 뒤 기관지에 관을 삽관해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보냈고, 중환자실에서 3주간 인공호흡기를 달고 있다가 숨졌다.   

 

최씨는 연명의료를 안 하겠다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써서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전산망에 등록해 뒀다. 하지만 쓸모가 없었다. 요양병원이 윤리위가 없는 데라서 전산망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서울대 허 교수는 "고심을 거듭해 사전의향서를 작성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활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 서식도 너무 복잡하다. 임종과정 판단 확인서, 환자의사 확인서, 가족 확인서, 연명의료 중단 이행 서류 등 한 번 존엄사를 이행하려면 4~5개의 서류가 필요하다. 이걸 일일이 전산망에 입력해야 한다. 외국에는 이걸 한 장으로 해결한다. 

 

김소윤 연세대 의대 의료법윤리학과 교수는 "종전에는 가족 1~2명 동의로 심폐소생술 금지요청서(DNR)로 연명의료 중단이 이뤄졌는데, 연명의료결정법을 시행하면서 종전보다 엄격해졌다"며 "가족 전체 동의의 예외 인정, 직계가족의 범위 축소 등의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데, 이런 걸 모아 법률 개정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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